성목귀비 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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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목귀비 손씨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후궁으로, 귀비의 지위에 올랐다. 손씨는 원나라에서 벼슬을 지낸 손화경의 딸로, 18세에 주원장의 첩실이 되어 딸을 낳았으며, 주원장이 황위에 오른 후 귀비로 책봉되었다. 손씨는 미모와 더불어 예법에 능하여 효자고황후를 도와 후궁을 관리했으며, 효자고황후는 주원장에게 손씨를 칭찬하기도 했다. 1374년에 사망하여 '성목'의 시호를 받았으며, 주원장은 손씨의 죽음을 슬퍼하여 아들이 없었던 손씨를 위해 주숙을 양자로 삼고, 장례 기간 동안 복상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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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목귀비 손씨 | |
---|---|
기본 정보 | |
이름 | 성목귀비 손씨 (成穆貴妃 孫氏) |
출생 | 1343년 |
출생지 | 허난성화이양구천주 |
사망 | 1374년 |
매장지 | 효릉 |
배우자 | 홍무제 |
자녀 | 임안공주 회경공주 10번째 딸 13번째 딸 |
씨족 | 손 (孫) |
아버지 | 손화경 (孫和卿) |
어머니 | 조사 (晁氏) |
2. 생애
손씨의 아버지 손화경은 원나라에서 벼슬을 지냈으며, 온 가족이 진주에서 상주로 이주했다.[1] 손씨의 부모는 원나라 말기의 전란으로 사망했고,[1] 13세 때 작은오빠 손번을 따라 강도에서 전고를 만들거나, 양주에서 전란을 피했다가, 원수 마세웅에게 양녀가 되었다.[1] 18세 때 미모가 뛰어나 홍건군에 남아있던 주원장의 첩실이 되었고,[2] 1360년에 주원장의 첫째 딸 유봉(Yufeng)을 낳았다. 1366년에는 그의 여섯째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의 개인적인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주원장이 황위에 올라 명나라를 건국한 후, 손씨는 귀비로 책봉되어 후궁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3] 귀비 손씨는 부모가 모두 죽고, 오빠들의 생사도 모르는 것을 슬퍼하여 주원장에게 오빠를 찾아달라고 요청했고, 주원장은 사람을 시켜 한참 뒤에야 손영을 찾았고, 주원장은 손영에게 참성의 벼슬을 내렸다. 손씨는 미모 외에도 예법에 능하고 행동 규범에 능하여 마황후를 도와 후궁을 관리하였다. 당시 마황후는 자선적으로 후궁을 관리하였고, 손씨는 법제로 마황후를 도왔다. 마황후는 주원장에게 손씨를 희대의 현녀로 칭송하기도 했다.
손씨는 홍무 7년 (1374년) 9월에 사망하였고, 시호는 '''성목(成穆)'''이 내려져, 성목귀비로 불리게 되었고, 향년 32세였다.[3] 주원장은 손씨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고, 손씨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주원장은 주숙을 손씨의 양아들로 명하여, 주숙에게 손씨의 장례 기간 3년 동안 복상하게 하였고, 황태자와 여러 황자도 복상하게 하였다. 주원장은 또 유신에게 《효자록》을 짓도록 명령하였다. 이때부터 서자는 생모를 위해 3년간 복상하는 것 외에 다른 아들들도 서모를 위해 복상한다는 예가 생겼다. 손씨는 조양문의 저강지원에 묻혔다가, 효릉으로 이장되었다.[3] 손씨가 죽자 주원장은 손영전에게 300석을 내려, 매년 공양하였다.
2. 1. 초기 생애
손씨의 아버지 손화경은 원나라에서 벼슬을 지냈으며, 온 가족이 진주에서 상주로 이주했다.[1] 손씨의 부모는 원나라 말기의 전란으로 사망했고, 큰오빠 손영은 재주가 있어 집을 떠나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손씨는 13세 때 작은오빠 손번을 따라 강도에서 전고를 만들거나, 양주에서 전란을 피했다.[2] 이후 마세웅(馬世熊) 원수에게 양녀가 되었다.18세에 손씨는 뛰어난 미모로 인해 홍건적의 난에서 여전히 싸우고 있을 때 주원장의 후궁으로 받아들여졌다.[2] 1360년, 손씨는 주원장의 첫째 딸 유봉(Yufeng)을 낳았다. 1366년에는 그의 여섯째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의 개인적인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주원장이 황위에 올라 명나라를 건국한 후 손씨는 귀비(貴妃)로 책봉되어 후궁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귀비로서 그녀는 성인으로 성장하지 못한 두 명의 딸을 더 낳았다. 손씨는 미모뿐만 아니라 예법에 능하고 행동이 발랐으며 마황후를 도와 후궁을 관리했다. 마황후는 주원장에게 손씨를 희대의 현녀로 칭찬하기도 했다.[3]
2. 2. 홍무제의 후궁이 되다
손씨의 아버지 손화경은 원나라에서 벼슬을 지냈으며, 온 가족이 진주에서 상주로 이주했다.[1] 손씨의 부모는 원나라 말기의 전란으로 사망했고, 손씨는 13세 때 작은오빠 손번을 따라 강도에서 전고를 만들거나, 양주에서 전란을 피했다. 이후 마세웅(馬世熊) 원수에게 입양되었다.[2]18세에 손씨는 뛰어난 미모로 인해 홍건적의 난에 참전 중이던 주원장의 첩실이 되었다.[2] 1360년, 주원장의 첫째 딸 유봉(Yufeng)을 낳았고, 1366년에는 여섯째 딸을 낳았다. 주원장이 황위에 올라 명나라를 건국한 후 손씨는 귀비로 책봉되었다. 귀비로서 그녀는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은 두 명의 딸을 더 낳았다.
귀비 손씨는 미모뿐만 아니라 예법에 능하고 행동이 바르며 마황후를 도와 후궁을 관리했다. 마황후는 주원장에게 손씨를 희대의 현녀로 칭찬하기도 했다.
2. 3. 귀비 책봉과 사망
손씨는 원나라에서 벼슬을 지낸 손화경의 딸로, 온 가족이 진주에서 상주로 이주했다.[1] 손씨의 부모는 원나라 말기의 전란으로 사망했고,[1] 13세 때 작은오빠 손번을 따라 강도에서 전고를 만들거나, 양주에서 전란을 피했다가, 원수 마세웅에게 양녀가 되었다.[1] 18세 때 미모가 뛰어나 홍건군에 남아있던 주원장의 첩실이 되었고,[2] 1360년에 주원장의 첫째 딸 유봉(Yufeng)을 낳았다. 1366년에는 그의 여섯째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의 개인적인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주원장이 황위에 올라 명나라를 건국한 후, 손씨는 귀비로 책봉되어 후궁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3] 귀비 손씨는 부모가 모두 죽고, 오빠들의 생사도 모르는 것을 슬퍼하여 주원장에게 오빠를 찾아달라고 요청했고, 주원장은 사람을 시켜 한참 뒤에야 손영을 찾았고, 주원장은 손영에게 참성의 벼슬을 내렸다. 손씨는 미모 외에도 예법에 능하고 행동 규범에 능하여 마황후를 도와 후궁을 관리하였다. 당시 마황후는 자선적으로 후궁을 관리하였고, 손씨는 법제로 마황후를 도왔다. 마황후는 주원장에게 손씨를 희대의 현녀로 칭송하기도 했다.
손씨는 홍무 7년 (1374년) 9월에 사망하였고, 시호는 '''성목(成穆)'''이 내려져, 성목귀비로 불리게 되었고, 향년 32세였다.[3] 주원장은 손씨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고, 손씨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주원장은 주숙을 손씨의 양아들로 명하여, 주숙에게 손씨의 장례 기간 3년 동안 복상하게 하였고, 황태자와 여러 황자도 복상하게 하였다. 주원장은 또 유신에게 《효자록》을 짓도록 명령하였다. 이때부터 서자는 생모를 위해 3년간 복상하는 것 외에 다른 아들들도 서모를 위해 복상한다는 예가 생겼다. 손씨는 조양문의 저강지원에 묻혔다가, 효릉으로 이장되었다.[3] 손씨가 죽자 주원장은 손영전에게 300석을 내려, 매년 공양하였다.
3. 자녀
성목귀비 손씨는 홍무제와의 사이에서 여러 딸을 두었다. 임안공주(1360년 – 1421년 8월 17일)는 홍무제의 장녀로, 휘는 옥봉이다. 회경공주(1366년 – 1425년 7월 15일)는 홍무제의 여섯째 딸이다. 이 외에도 홍무제의 열 번째 딸과 열세 번째 딸을 낳았다.
4. 평가
참조
[1]
문서
胜朝彤史拾遗记
[2]
간행물
Ming Shilu
[3]
간행물
Ming Shi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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